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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를 감동시킨 '고난의 연인들'
안젤로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Angello Roncalli)는 1881년 오페라 작곡가 도니체티(Donizetti)의 고향인 베
르가모 외곽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출신 성분이나 타고난 밝은
성격 등이 쌀쌀맞은 성격의 선임자 피우스 12세와는 너무 달랐다. 그래서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의 '평범성'
에 대해 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고향땅 롬바르디아에 대해 거의 종교적인 애정
을 품고 있었다.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이 롬바르디아 땅의 정취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 알레산
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의 <고난의 연인들(I Promessi Sposi)>을 통해 이해했다.
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에 나오는 농민 연인들은 두 명의 귀족적인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어려움
을 해결한다.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두 사제를 본받으려 했다. 지역 신학교를 다닌 뒤 로마에서 공부를
마친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베르가모로 돌아가 주교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교구 신
부가 아닌 교회 관료조직의 일원으로 일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때대로 교회법을 강의하긴
했지만, 끝까지 교회 관료로서 일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역할 모델은 그와 같은 고향 출
신으로 시성된 밀라노 주교 카를로스 보로메오(Charles Borromeo:1538-1584년)였다. (하지
만 액턴 경은 이단에 대한 벌로 사형을 언도한 보로메오를 결코 용서 할 수 없었다.) 교
황 피우스 4세의 조카였던 보로메오는 바티칸의 국무장관으로 봉직하면서 교황을 도와 트
렌토 공의회 3차회의를 주관했다. 밀라노 주교가 된 그는 담당 영역을 공의회가 주창한
규율 개혁의 모델로 만들었다. 그는 회의를 통해 사제들과 상담했으며, 그가 관리하던 1,000
여 개의 교구들을 모두 사찰하기도 했다 - 그가 그 교구들 중 하나인 베르가모에 만든 신
학교에 훗날 론칼 리가 출석히게 된다. 안젤로는 보로메오의 현지 방문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는 다른 많은 일을 제쳐두고 30여 년 동안 그것을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
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으로 선출되기 한 해 전인 1957년에 마지막 권인 5권을 출간하
는 데 성공했다.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을 제외한다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도서는 보로메오와 만초니의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이었
다.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여러 교회관료 자리를 거치면서 보로메오를 본받아 사제회의를 열었고, 자신
이 담당한 구역의 신앙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현지 방문을 하기도 했다. 론칼 리가 '총회'를
열어 교회 개혁의 도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보로메오가 트렌토 공의회에서 한 일
에 감화받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모델을 현대에 되살려내어 사용하는 그의 능력은 교황
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훈련의 일부였다 - 일흔의 나이에 이르러 교황이 된 그는 비판가들
(그리고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준비가 잘되어 있었다. 론칼 리가 종종 자료를
찾기 위해 들렀던 밀라노의 주교관은. 그의 인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그곳에서
그가 1960년대에 열었던 공의회에서 중요한 동맹군으로 활약한 추기경 조반니 바티스타 몬
티니(Goivanni Battista Montini)를 만났던 것이다.
밀라노에서 만난 이 두 사람은 모두 만초니의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에 깊이 감화받고 있었다. 비록 만초
니가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판의 토스카나 방언을 다듬기 위해 피렌체로 떠나긴 했
지만,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흥미로운 사건들은 밀라노 안이나 그 주변에서 일어났다.
내용을 보면, 17세기의 가상공간 속에서 폭동과 전염병이 모든 형태의 사회적 정을 위협하
는 와중에, 영웅적인 사제들이 공동체의 중요한 지주로 등장한다. 카를로스 보로메오의 친
척 페데리고 보로메오(Federigo Borromeo)는 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밀라노의 추기
경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카를로스 보로메오가 용감하게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았듯이, 만초
니의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 속에서는 카푸친 수도사가 바로 그런 일을 한다.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에 등장하는 이 모든 아야
기들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고난의 연인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돈 키호테>가 스페인 사람들에
게 주는 의미와 같다. 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은 프랑스 사람들이 생각하는<보봐리 부인>이나 미국인들이
생각하는<허클베리 핀>보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베르디가 만초
니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 작곡가는 만초니의 신앙시들을 음악으로 만
들면서 작곡을 시작했고, 그의 생애 최대의 명작은 만초니에게 바친 장례 미사곡이었다. 마
침내 이 부세토 출신의 음악가가 '성자' 만초니를 대면했을 때, 그는 어느 때보다 더 흥분했
다.
만초니는 전통과 현대를 묘하게 결합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은 민족국가
로 통합되어가는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기호화했다. 그는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을 순수한 토스카나어로 고쳐
쓰면서 평상어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세속의 애국자들과 신실한 신학생들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 만초니가 어렸을 때, 위대한 계몽주의 사상가 체사레 베카리아(Cesare
Beccaria)의 딸인 모친은 한 프랑스인과 함께 파리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그녀는 드 스탈 부
인(Mme.
de Stael)의 살롱에서 일단의 '이데올로그'들과 교류했다. 이런 환경과 마주친 어린 만초니
는 곧 신앙심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제네바에서 온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인 헨리에트
블론델(Henriette Blondel)과 결혼한 후 다시 카톨릭 신앙을 되찾았다.
그러나 만초니는 신앙심을 유지하면서도 교회 내의 타락한 구성원들을 예리하게 풍자하기
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그는 예수회를 경멸하여, 이 교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17세기를
배경으로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을 쓰면서도 예수회를 빼버리는 역사적 왜곡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는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 속에서 겁쟁이 신부나 수녀원의 가학적인 원장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결
코 신앙심과 교회에 대한 순종을 혼동하지 않았다. 안젤로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바로 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고난의
연인들에 나오는 인간 만사를 평생 동안 궁구한 끝에 인간 심리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얻었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은 시골 베르가모 출신의 안젤로에게 에티켓 북 역할도 했다.
만초니는 헨리에트 블론델의 영향을 받아 교회주의를 떨쳐버린 '복음 기독교'를 생각했다.
그의 페데리고 보로메오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레 미제라블>네 나오는 착한 주
교를 좀더 섬세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금세기 중엽 론칼 리가 보여준 세계
교회주의적 태도는 만초니의 범교회주위적 사상에 의해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
다.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으로 베르가모에서 그가 비서로 있으면서 모셨던 주
교 자코모 라디니 - 테데시(Giacomo Radini Tedeschi)를 들 수 있다.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라디니-테
데시가 죽은 후 발표한<내가 모신 주교>라는 글에서 그의 사회주의적 자유주의를 찬양한
바 있다. 하지만 그 글은 보수적인 바티칸 관료조직에 경고음을 울렸다.
그 때문에 당시 떠오르던 교회 외교관 론칼 리가 불가리아와 터키에서 궃은 일을 처리하는
신세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는 관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4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까
지 이 두 나라에서 각각 10년씩을 보냈다. 그동안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자신이 맡은 갖가지 궃은 일에
화를 냈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 두 나라에 머문 것이 새옹지마가 되었다.
1930년대에 불가리아에 체류했기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사제들처럼 파시스트
와 연관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터키에서 수천 명의 유태인들에게
바티칸 비자를 제공하여 중에는 터키에서 수천 명의 유태인들에게 바티칸 비자를 제공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귀족적인 터키 주재 독일대사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은 바티칸에서 온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와 함께 유태인들을 구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그 두사람
은 후일 서로를 위해 증언했다 -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파펜을 위해 증언했고, 파
펜은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의 시복과정에서 그를 위해 증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이 성지를 장악할까 꺼려했던 교황청이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반대할 때,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교황 피우스 12세의 정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에 협조하여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교황 피우스 12세는 마침내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를 유럽 정치의 중심으로 불러들였다.
프랑스 주재 교황청 대사가 된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샤를드골이 전쟁 동안 비시 괴뢰정부에 협조한
주교들을 숙청할 때,그 숙청작업을 완화시키는 데 (내키지 않았지만) 일조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지성계에 카톨릭 예술과 철학이 부활하는 것을 방해하라는 훈령을 받고 그에 따랐
다 - 이를테면 그는 드골이 자유주위적인 신학자인 자크 마르탱(Jacques Martain)을 바티칸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영어로 가장 잘 쓰여진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 전기의 저자는, 그가 전후 실존주의와 현상학이 유행하던
당시 프랑스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예수회의 일원인 고생
물학자 텔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가 한 말은 다른 경
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전형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는 교회의 교리문답이나 여
타 사회적 교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런 문제들을 일으킬까?" 기질상 억압적인 인물은 아니었
던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로마가 가혹한 조치를 실행했을 때 그 일에 관여혀지 않을 수 있었다. 피우스
12세는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의 후임을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 전임자처럼 되지 마시오. 그는 한 번도 자기 자리에 있었던 적이 없소." 중용의 입장
에 서 있었던 디아블로2 : 파괴의 군주는 로마와 프랑스의 교회와 정부 지도자들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힐
만큼 수완이 좋은 인물이었다. 두툼한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 놓여 있는 함정들
을 잽싸게 피해 다녔던 것이다. 파리의 대주교 모리스 펠탱(Mauris Feltin)은 이렇게 말했
다. "그는 섬세하고, 현명하고, 멀리 볼 줄 알았다. 나는 그가 그를 이용하려던 사람들의 손
아귀를 잽싸게 피해간 사례를 수없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파리 생활을 끝내고 1953년 베네치아의 추기경으로 취임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30년 동안이나 외국 임지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와 (아마
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다.